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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용호 조각의 세계/작품세계의 관념

예술계의 관행 복제의 미학 그리고 조수 & 조영남 논란? 한국 브루델 계보 조소 사실주의 자존심 장용호

뭐 많은 이야기가 있다.

미를 표방하는데 걸림이 없다보면, 세간의 논란에 휩쓸리기도 혹은 해당사항이 없듯 이해되기도 됀다.

작가는 이제 환조, 부조, 평면의 경계를 넘어선 예술 세계가 된 지 벌써 수많은 세월이 흘렀다.

 

그만큼 작품 복제의 기준을 다방면으로 넗혀 놓는데 궅이 예술의 자산화를 저평가 시키어서 크게는 국익, 작게는 소장가의 불편함을 감수할 여론을 만들지 않고 예술계를 놔두려 하는 것은 자산이기 때문일 것이지만, 불미의 드문 논란이 터진 것은 특수한 것인데, 보조 조수와의 작가성 사기 논란을 작가의 자질과 처우 불평등을 틀어진 관계로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서 개선되는 선순환과 경제적 형편에서 자신의 학연으로 공증되지 못한 듯한 작가들의 처우 개선의 명리가 드러나길 바란다.

 

 

통상 그림은 극사실계열(예: 당연히%책정 불가지만 수법 차이는 뛰어난 작가일수록 모작의 진위 여부에 비교적 명확하다는 막연한 말을 할수 있지만 분명히 차이가 나기는 난다. 특히 극 사실, 사실 계열이다. 네오나드로 다빈치가 스승의 그림에 남긴 천사로 주목을 받았다.)은 조수가 자신의 작품을 50%이상 정도를 상회 웃도는 작업에도 그 작가의 작품임을 인정(공동 제작 명기가 바람직한데 이러한 사례는 이미 서구에서 있어오기도 했다.)한다.

하지만 복제본은 작가가 싸인 몇번째 복제를 명기하거나 자신의 원화의 작업과 판이한 상태에서 나오는 복제성이(가) 명확해야 한다.

 

 

우리나라 예술계는 복제의 미학이 판화 작가 만의 전유물로 일부러 복제의 미학을 관행 해 온 유명한 작가 앤디워홀을 들어 다분하게 이해관계를 형성하고 있고, 

거의 다 조수들이 7~80을 상회한 것으로 생각되어 지는데, 사후 복제도 있는 것도 어디까지 선에서 저작권 적인 혹은 조수의 측면에서도 값이 고가 일수도 있다.(스승의 유작을 복원 작, 혹은 상속 복제 저작권 원작보다는 조금 값이 떨어질진 모르나 희소성이면 그만한 예우가 따라온다.) 그리고 천경자는 자신의 전 100%를 추구하는 작가로 봐야 한다. 그러나 또한 판화도 남겼고, 적은 값이 아니다. (자신의 친필 싸인 때문에, 중고장터에서도 께끗한 다색판화가 아님에도 500만원 추정대가 나올 정도이다.)

예술에서 복제의 미학이 금전화 될 때 싸인도 작품가%의 고유률을 명심하고 시세를 판독해야 한다.

 

 

조소도 아직 조금 기준이 엄격하지만, 아무리 같은 것을 작가 본인이 주도한 내력은 터치를 잘 안 한다.

 조소 조각은 사후까지도 연장 시켜 10점 정도 선에서 합의 시키는 복제의 관례고, 아무리 뽑아도 제대로 나온 작품을 두고 그 작가의 작품인 것은 분명하므로 유연한 측면이 있지만, 예술계가 굳건하지 않은 나라들의 작가들은 희소성 감축으로 작품가 가 떨어지기 도 한다.

 

조소 조각의 복제적 특성 상, 값이 떨어질지는 작가나 유가족에게 책임이 자동으로 넘어가서 일임하게 되는 경우도 있는데, 넗게는 보상 차원에서 조수나 제자에게 권리 권한이 넘어가게도 되는데, 유가족이 사사 제자나, 제자에게도 상속(조수, 심지어는 보조에게도) 시키는 경우(예: 수월 선생 유가족의 사례)도 있기 때문이다. 다른 유화나 수체화는 한국에서 유명인에 대한 책임을 더 하게 되기도 한다.


현대 조소 사 적으로는 로댕이 조수나 제자를 많이 썻고 로댕 보다 덜하지만 브루델도 조수나 제자를 굉장히 많이 썻다.

 이런 것으로 논란이 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로댕은 생전에 작품성 의문 제기에 기인한 혹평, 로댕 브루델은 후대에 여성 편력 일화가 좋건 나쁘건 알려져 있다.

 

 

조영남씨를 두둔하는 게 아니고, 조영남씨가 생각보다 구두로서 말하기에는 자신의 명성에 있어 경허한 와중에서 강론도 언변도 섵불리 할수 없을 정도의 유명 인사가 아닌가 한다.

명성이 높은 사람은 어느 정도 공개하고 자신의 조수나 제자를 키워줘야 하는 것은 작가의 양심에만 맞기는 유형이 대부분이라 서구 적인 유래를 언급하기에는 우리나라의 예술계가 언론에서 이번 논란을 두고 얻어지는 이목도 얻어지는 기사 속에서 특종 시켜 놓는데, 대중에 있어서는 아직도 회화 분야에서 산업화 양상보다 개인의 창작으로서 만 알려진 예술계 위인들을 흔히 떠올리기 마련이다.

 

한국은 앤디워홀처럼 연예계의 명성과 친분으로 얻어진, 작가가 드문데 조영남(50生) 화가가 한국에서는 메스컴과 결합한 그런 부분적인 예라고 볼 수 있다. (애초에 작품력 질 논란이 있다가, 대필 논란으로서 조수인 송작가가 들어서서 주재의 공간 배치 능력이 회화에서 주어지는 인지가 개선 되 나타나진 것인가? 에 대한 말들도 있다.)

하지만 판화적인 측면과 자신의 작품을 분리에서 값을 매겼으면 좋았을 것이다.

조영남 작가는 자신만의 필력으로 승부 하는 작가로 평시 알려진 것으로 배신감을 느꼇을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조수에 대한 충분한 보상과 자기 작품세계의 기준에 대해 지명도만큼 명확한 언변이 미리 깔려졌어야 한다는 것이 지배적인 이유다.

 

하지만 이번 사태의 반면 교시로서, 한국도 앤디워홀 처럼 한편으로는 공인 공증된 복제적 예술 산업화를 추진해야 장래 적으로 먹고 살 수 있는 국가적인 재력을 구축하게 될 수 있다.

 즉 자신의 제자나 조수 혹은 자신의 비 공개적인 처우가 치부로 치부 된 체  "덮어두고 낳다 보면~ 거지 꼴을 못 면한다" 가 아니다. 사람은 예술은 결코 혼자서 만 될 수 있다는 편견을 버려야 작가나 제자나 조수들이 살 수 있다. 개선 될 수 있는 여지를 염두 하며 작가의 마인드가 필요한 것이다.

 

 형편이 잘나가는 작가의 도마도 무서운 평가가 관행 속에서 냉담하다.  이상봉(55生)씨의 논란이 주마등처럼 지나간 지 오래다. 하지만 적어도 못사는 사람들의 형평성에서도 무서운 질책이 있기 마련이다. 

 

 

한마디로 복제라도 값이 떨어지지 않는 금리적 현물, 예술의 환금성이 미국의 미술계의 금전 가치를 재력화 하여, 그 나라의 자산 가치가 더 늘어난 꼴을 가만히 보고만 있기에는 아까운 것을 왜 모를리 없게 끔, 이러한 예술 자산화에 기어 지원 투자를 해야 국가적 자본이 늘어나게 된다. 이를 반면교사를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진행형인 한국 미술시장은 미국에 비해 생각보다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이 책임감은 오픈 시장, 오픈 미술 경제를 미국과 유럽의 개방적인 미술산업화를 우리가 일당 독재로서 복제에 사기성에 거품만 물듯이 집요한 편견에 있으라는 법은 평생 없다. 이미 미술 시장은 오래전부터 산업화를 꿈꾸고 그렇게 달려온 내력이 있어왔던 것이, 서구 유럽의 도제 문화에서 비롯된 장인 정신의 도급화 다.

우리도 조선조에 늦은 도제 적인 도입이 아니다 문제는 국가 한도의 경제권으로 미술을 두고, 일부 불화 도제 승려들과 비슷한 풍조를 양반의 전유물이 아니면, 통상 천시로서 속 된, 의 중이 많던 때라 우리 현대 수묵화의 경쟁이 중국에 비해 극 사실이 풍성하지 못해서 단원 몽유도원도 같은 그림이 희유한 꼴이 된 것이다.

 

하지만 중국의 피카소로 알려진 치바이스는 자기 아들에게 자신의 인장을 일임하는 경우도 있었고, 흥선대원군도 제자에게 인장을 쓰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실성은 중국이 경제 주도권을 휩쓸면서, 자기 나라 계보의 미술시장을 한껏 높혀 놓아 이 치바이스의 문인화는 피카소와 맞먹는 미술 창사자로 금전적으로 드높혀 놓았다.

복제도, 작품이 많은 것도, 위작이 많은 것도, 그의 명성에 결코 훼방놓지를 못했다. 피카소와 맡먹는 금전을 들여놓은 중국미술의 자존심으로 키웟거 늘, 

 

을 중아직 미술과 자본의 투기성을 가진 경제 시장의 활성은 비례 있게 중견작가나 신진작가가 고르게 주목되거나 커가지 않고, 사실주의 작가에 대한 냉담 어린 국내의 시선 및,

더군다나 중국의 늦은 추격의 경제 맹주권도 지금 와서 나타나서 미술 시장이 중국으로 넘어가서도 한국에서 기회 적인 작가들의 비례성 있는 급부상을 이제 기대하기 어려울 수 있으나, 근본적인 습은 조선 말엽부터 속된 말 중에 예능계나 미술계를 환쟁이라고 일컬었다. 이 습이 일제시절을 거치며, "조선 사람이 아니꼽게 예술이 다 무어냐. 먹고 살 것이 중하지" 하는 시절을 거치며, 일부 작가의 거대성과 선전이란 관전의 영향, 그리고 과거 국전의 수도권 학력 위주의 위상 속에서 소외된 지방 작가들의 애환이 한국 미술계의 부담스런 현실 속내인 것이다.

 

이러한 틈바구니 에서도 먼저 중국 대륙에서 꽃 피우길 고대해야 만 했던 작가들이 그토록 한국 미술계에서 사양 작가로 낙인 찍힐뻔한 극사실계열 작가들이었다. 이들을 주목한 일부 화랑계와 홍콩 크리스티에서 인정된 작가들이 사실주의 풍으로 중화권의 경제와 향유 되는 금전 가치의 급부상으로 인정된 작가들로 추대 받은 일화들도  중국 미술시장에서 역으로 국내에서 화랑가들의 뜨거운 관심으로 시사하는 바가 있다.

 

 

사실주의를 외면한 경고는 조소계에서는 권진규 선생의 또 다른 한이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사실주의가 불행하다고 시사한 바가 있었음을 비추어 볼 수 있다. 어느 정도로 미술 시장에서 입지 전적인 지원이 필요한 작가도 있다.

특히 조소 분야는 더 하다고, 증언 해줄 수 있다. 리베이트 실태, 각종 불공정 거래를 강요받고 있는 작가들의 삶과 미술계 로비 실태 및, 경쟁이 치열하여 국내 시장 만으로는 어렵고, 경주 경북을 예로 들자면, 외국을 교류로 해서 경주 출신 중 조각가 오채현이 유명하다. (해외에서 아트페어 주목 경주 출신 신진 작가도 있다.)

 교수나 학원 원장(경주에서는, 서양화가 손수택의 아들이신 영남대 조소과 스파이크디자인전문미술학원 손범천sbc0709@hanmail.net)이지 않으면 어렵다는 단편적인 예로 조각가 중 (現경주 거주) 김석중(성파의 한국수자원공사 준공기념물 제작 동참)씨가 직종 변경을 하고 있을 정도다.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했을 뿐이지 조각가 이동호씨의 고등학교 제자 윤형진, 불교조각가 정광화(강원도 태백출신), 경주에는 조각가들의 잇닿은 자살이 있었다.

<21 5/27 오류정정: 아직도 작업과 사모님이 식당을 겸업하는 서림공방 정남호(목공예가) 선생은 정광화 선생과의 인연이 있던 나머지, 경주에서, 부고 라는 어불성설 루머로 변질 되어 재생산 되어진 탓에 잘못된 진심으로 사과하며 정정 한다.>

이런 수년 간 경주 조각 예술계의 악전 투고 와중에도 16년도 "동경 조각회"가 창립했다. 

 

16년도에는 언론에서 주목 받은 희소식(이코노믹 뷰어의 특집에 이왈종 화백(교수 후 전업 작가/현재 수년간 그림 작품가가 제일 많이 오른 대표적인 작가 중 하나)이 실려있는 여기에 특집 제의가 오고 조선일보에서도 수상 제의, 작가는 형편 상 반려.)이 경주에서 성파의 아들(9년동안 아들로서 성파 장용호를 4년간 사사, 사업차 취직 계획이 있고, 차후에 계보를 이을지는 미지수[전업작가는 아니나 계보를 이을 결심을 하고있다.17/0309])로서 내 놓았다.

 한국 근 현대 미술계에서도 중국에서도 희유한 수월의 브루델 계보를 뒤늦게 알려 밝혀진 대서특필 중에서도, 미술 학예가들이 전부터 수월 김만술 선생을 조명하지도 연구조차도 제대로 못했다는 증빙이 나타난 것으로서, 근현대 미술사에서 자존심이 걸린 것이 아닌가?

 

(수월의 한국 근현대 조소 미술의 순번 순수 미술 7번째 작품 해방은, 수월의 친구(어떤 학예가는 제자라 표현) 관성 김준식 선생이 가지고 있던 해방을 이후 화랑가(정확히 모르지만)에서 브론즈 10점을 복제한 뒤, "석고 원형은 복제 중 손상이 되어있다., 지방에서만 주로 활동했다. ,미술사적인 지명도가 떨어진다., 복제가 많이 되어있다." 등을 이유로 근 현대 문화유산 지정에서 보류 되었다.[원형만이라도 제가치를 인정받길 바란다.17/0309]

- 관성 김준식 선생의 형편이 어렵지만 않았어도 그렇게 쉽게 매매가 된 아쉬움은 어쩔 수 없다 손 치더라도, 권진규 선생이 작품을 많이 한반면, 수월 선생은 큰 작업을 많이 했다.

 미술사 적 지명도는 학예가들이 수월의 브루델 계보를 알고 있었어도, 수월 선생이 살아 계실 적 구술만 제대로 받았어도 이런 말이 결코 나올수가 없다는 것을 이해해주길 바란다.)

 

한국 최초 조각가 김복진의 직속제자 이자, 브루델의 제자 사이토 소원을 수학(사사로 보여져...)한 수월 김만술의 20년 사사생 성파 장용호

[(50生)김번(42生사사) 향석 이동호(43生제자)

 外계보: 부르델을 사사한 시미즈 다카시의 사사제자 권진규의 2년사사 이동우(50生)]

도 대외적인 외국 교류를 도외시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작업에 몰두 한 바람에 결과적으로 이에 못지 않다.

 

 그런 예 중에 하나로 생각해 볼 수도 있는데, 이 정도 내력을 세상에서 거의 몰라서 알아보지 못한 것도 있었지만, 성파도 브루델 계보를 알려준 바가 없었다.(10명의 사사 제자들 사이에서도 대부분 듣지도 못했다.)

 

사진작가 문선호 선생 타계 이후에, 주춤하던 이후에 지명도가 올라간 이유는, 중국에서 파견된 한국계중국국전대상 허문집 선생이 작품성을 알아보고, 04년 제3회 중국조각예술제에 먼저 10개국 조각가 들 중, 한국 조각가로서 최초 특초 된 것이다.

 또한 작품성으로 감명 받아서 중국에 비해 조그만 한 작업실을 친히 보려고 중국 조소협회장이 특별히 내방(계보도 알려준 바 없지만)한 바 있지만 한 차레 언론에 밝혀준 바가 없었을 정도였다.

- 이런 사사 학력의 소유자들도 다시금 재 조명이 미술사 적으로 필요하다.

 

 

작가가 자신의 전업활동에 있어서, 유리한 결과를 보게 될수도 있지만, 어렵게 살아 왔어도 지방에 해방 후 첫 예술학교 경주예술학교 1회(교수 김준식, 주경 등.) 졸업생 조희수 화백(수월 선생과 성파가 둘다 흉상으로 만들어드린 작가로는, 교직으로 예술계에서 작품이 주목받지 못한 박재호 화백이 있다. 유족의 수장고에서 때가 되면 빛을 보기를)같은 자신의 그림을 거의 안팔고 모아두며 살아온 분들도 그 의의 를 알아주는 사회가 와서 국가에 예술이 자산 가치화에 기어하는 쾌거로 살찌워서 보탬이 되는날이 되어 하루빨리 열리기를 소망 한다.

17일 수정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