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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용호 조각의 세계/작품세계의 관념

1950-60년대 한국조각의 전개와 특성(中 김경승 맥아더 장군제작(별외:김만술 공동제작)/김만술 언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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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60년대 한국조각의 전개와 특성 

박미화(학예연구사) 

전략- 

기념조각 
1950년대 우리 나라 조각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특징 중의 하나가 기 
념조각의 제 작이다. 1950년에 6·25가 발발하여 맡은 작가들이 부산 
으로 대거 이동함에 따라 작 품 제작활동도 잠시 부산에서 이루어졌 
다. 이런 중에서 기념조각이 제작되었는데 그 것은 윤효중과 김경승 
에 의해 제작된 [이충무공상]들이었다. 

원래가 기념조각은 동양적 이라기 보다는 서양적이다. 공공장소에 시 
민들의 의식 올 고양하고 시각적인 즐거움을 제공해온 역사는 르네상 
스 이후 유럽을 장식해온 특징 중의 하나이고,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초상화라든지 회화에 의존하여'온 편이 다. 그러나 이 시기부터 우리 
나라에도 기념조각이 제작되기 시작하여 60년대 후반 까지 전국적으 
로 약 150여점이 꾸준히 제작되었다. 

1957년에 제작한 김경승의 [맥아더 장군상](도 41, 42)은 거국적인 모 
금운동에 의 해 제작된 만큼 꽤나 성공적인 기념조각이었다. 왼손은 
주머니에 넣고,오른손은 망 원경을 잡고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맥아 
더 장군상은 얼굴표현도 매우 세밀하게 묘 사되었다. 

이외에도 김경승과 윤효중은 같이 1950년대에 가장 많은 기념조각을 
제작하여 화제를 모았다. 윤효중은 약 20여점의 기념동상을 세웠는 
데 그중에서 1957: 이승만 대통령의 80회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81척 
의 거대한 규모로 남산에 세워진 것이 걸작이다. 그러나 4·19혁명으 
로 주인공과 운명을 같이 하여 철거되는 비운을 겪어야만 했다. 그러 
나 윤효중은 매우 활발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미술교육자이면서 작가 
그리고 미술경영에 이르기까지 자못 외향적인 사람이었다. 사회적으 
로 미술이 라는 위치가 미약하고 특히 같은 미술계에서도 조각이라는 
분야가 지극히 왜소한 형편을 못 벗어나고 있을 때 이러한 윤효중 같 
은 행동인의 출현은 뭇사람들의 주목 을 끌면서 많은 기념조각 제작 
의 주문을 맡을 수 있었다. 

광화문 세종로의 ]이순신 장군]상은 1968년에 김세중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서 특 기할 만하다. 거대한 규모의 이 작품은 동적이기 보다는 
매우 정적인 자세인데 둥 근 원통형을 기본으로 당당함을 강조하고 있 
어 우리 나라 전통의 무덤 주위에 있는 석상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 
외에도 사직공원을 비롯하여 국내의 크고 작은 공공 장소는 대부분 
한 두개의 기념조각상을 세워 놓고 있다. 

기념조각의 제작은 1960년과 1961년에 일어난 4·19와 5·16군사혁명 
으로 인한 혼란스러운 60년대까지 활발히 진행되었다. 더욱이 의도적 
으로 애국적인 사회분 위기를 유도하려는 정책적인 뒷받침으로 더욱 
활성화 되었는데 그 이면에는 여 러 비판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 무렵 4·19기념조각 공모전에 떨어진 차근호 는 자살을 하였고, 졸 
속으로 제작된 작품들은 그 시대적인 배경과 검토가 제대로 되지 않 
는 시행착오를 겪기도 하였다. 그 중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작품의 
조 형성인데 주변공간과의 조화가 잘 고려되지 않은 채 기존의 기념조 
각을 답습하는 형태로 제작되어 마치 여러 작가들이 제작했음에도 불 
구하고 한사람이 제작한 듯한 인상을 준다. 

또한 애국선열들의 초상을 석고로 제작하여 세종로에 세웠다 가 철수 
하는 등 사전에 재료에 대한 철저한 분석도 하지 않은 성급함을 보이 
기 도 하였다. 

이러한 시행착오 속에서도 기념조각은 계속 제작되어져 많은 작가들 
이 기념조 각과 개인 작품과의 차별성으로 둠으로써 기념조각으로 인 
한 또 다른 현상들을 수반하기도 하였다. 추상조각을 하는 작가여도 
기념조각의 제작을 의뢰 받으면 사 실적인 인물표현을 해야하므로 그 
것은 결국 작품의 질적 가치를 저하시키는 결 과를 초래하였다. 

동상을 주로 한 기념조각은 한 민족이나 인류에게 위대한 공헌을 남 
겨 후세에 지 표로 삼을 만한 인물들을 선택하여 조성하는 것이 통례 
다. 그만큼 사회적인 의미가 스며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결코 한 개 
인의 사적인 취향에 의해 이룩되는 사유물 은 아닌 것이다. 따라서 
한 시대의 가치관과 조형성을 가늠할 수 있다는 구체적인 척도로서도 
동상조각은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1966년 본격적으로 출범을 본 애국선열 조상건립위원회(총재' 김종필) 
의 활동은 도시의 곳곳에 새로운 동상들로 줄을 서게 했다. 건립1차연 
도(1968)의 이순신장군 (김세중)을 비롯, 세종대왕상(김경승), 사명대 
사상(송영수)등이 건립되었다. 

이렇듯 곳곳에서의 동상제작은 어느덧 동상과 작가라는 조각계의 유행 
어를 출현시킬 정도 로 성황을 이루었다. 따라서 한꺼번에 몇 점씩 제 
작하는 겹치기 사례도 속출했으며, 때로는 고증 문제등 졸속한 사례 
도 나타나 관심있는 이들의 빈축을 사기도 했다. 

동상조각에 참여한 작가를 개인별로 살펴보면 40여점 이상을 제작한 
김경승의 경우가 단연 두드러지고 있다. 그 다음으로 백문기, 김정 
숙, 김찬식, 김영중, 김만술, 최기원, 김세중,윤영자 등이 기념조각 
에 많은 관심을 보인 작가들이다. 

이 기념조각상들은 짧은 기간 내에 무책임하게 조성된 것들이 많다. 
본래의 주인 공이 지니고 있는 역사적인 위치나 인상이 오히려 동상으 
로 인해 위화감을 초래하 는 경우도 있었다. 사회성이나 예술성마저 
결여된 상태의 졸속 제작은 곧 시각공해 로 동상미학의 정립을 시급 
히 촉구하기도 했다. 

기념조각은 확실히 한 사회의 정신 적인 거울이기도 하다. 아무리 부 
족한 제작비와 주물시설의 미흡 등 주위 여건이 나쁘다하더라도 책임 
감 있고 의식 있는 조각가들의 제작태도가 절실히 요청되기도 했다. 
어떻든 동상을 비롯한 기념조각품들은 이 시대의 환경조각으로서 한 
사회의 정신적 등가물이라는 점을 깊이 검토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 
다.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