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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용호의 중심 공간!/다양한그의 인연

권옥연 화백(9촌 삼종숙부 브루델 제자의 제자 권진규)과, 성파 장용호의 인연(브루델 제자의 제자 수월 김만술 사사)

진규아저씨는 나보다 한 살 위지만 항렬로는 삼종숙뻘이다.

어린 시절 문중의 시제나 잔치 때 만나보곤 했는데 정작 나와 가까이 지내게 된 것은 해방 후 부산피난시절이었다.

예술가이기보다 장인으로서의 자부심 대단

진규아저씨는 형님이 한 분, 누이가 네 분 있었는데 동경에서 의과대학을 다닌 형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독자가 되었다.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건너가 동경무장야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부르델」의 제자인 「시미즈·다카시」(청수다가시)에게 근대조각의 정수를 배웠다.


[출처: 중앙일보] (4)1988.01.26 00:00 | 종합 14면




"포항mbc에서 섭외요청도 없이 우연히 단문 인터뷰를 남겼는데, 권옥연 화백은 내 얼굴과 똑 같아서 깜짝 놀랐어. 나보다 쬐끔 늙었지만 말이지 사진작가 문선호 선생은 외람된 말이긴 하지만 지방에서 썩기에는 너무 아까운 작가다 김남수 미술평론가도 박수근을 빗대어 성파의 가능성을 보았으나 석연치 않다.

권옥연 화백이 박수근의 국전 수상 미달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거부한 그의 작품 소장을 미리 적극 권유한 예시적 눈썰미로 세간의 화제가 된바 있는데, 사실 브루델을 사사한 시미즈 다카시(淸水多嘉示) 제자 권진규(작품가 흉상 33)  9촌 삼종숙부, 다른 브루델 제자의 제자가 수월선생임을 권옥연 화백조차도 성파가 알려준바 없었다고 하는데, 알았다면 반응이 더더욱 궁금할 뿐이다."


조각스승으로서 같은 代의 제자에게 흉상을 맡긴 놀라운 우연과 그가 이런 예리한 호평 속에서도 경주에 머무르는 이유는 다시금 지방예술태동의 시원을 향한 염원과 조각 스승에 대한 예우에 사사로서 이어지는 과정에서, 유명세보다 창작욕에 몰입하는 작품 욕으로 비춰진다. 졸 지어 내력을 수월선생처럼 고대경주의 불교조각까지 들켜 얹혀간 것이다.

(말이야-> 말이지, 삼촌-> 9촌 삼종숙부: 숙부는 삼촌을 뜻해서 어떤평론에는 삼촌이라고도 기제됨 9촌 삼촌이라고 기제해야 가깝다.)


-시사뉴스타임 5월호 중에서- 윤영수 기자의 성파 장용호를 취재하며, 송고된 내용이다.


"학연이 없이 대성한 조각가이고 보니 그의 작품세계는 독창적이고 개성이 뚜렷한 자기언어를 가지고 있다 . 서양화가 박수근도 스승이 없이 독학으로 수학하여 한국 정상의 제 1 인자가 됐다 . 그에게는 미술대학도 외국유학도 미술관련 전문서적도 전혀 접할 기회가 없었다 . 그는 한 눈을 팔지 못하고 오직 올곧은 한 길만을 걸어가야 하는 것이 운명적인 것이었다 . 그래서 그는 남의 것 훔쳐보는 기회도 없었고 모방이나 흉내를 몰라 유화인 순종 한국성으로 세계시장의 공감을 얻은 것이다 . 그의 작품이 소더비나 크리스티 등 세계경매시장에 상장되는 것도 그들에게 세금과 경매수수료를 떼어주는 것도 국제시장의 공신력을 통하여 공인 받고 있기 때문이다 .

장용호도 비록 조각 장르의 발상지가 서구이기는 하지만 그가 화랑도상 , 김유신상 등 한국성을 추구하면서 창조적인 조각상에 심혈을 쏟고 있으며 , 금후 만일 그의 작품이 국제적인 공감대를 얻어 낼 때 세계수준의 반열에 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


-아트코리아 06년 1월호 중에서-


(참고로 김남수씨가 국전 입선 두번의 성파를 권옥연 화백의 뜰작가를 알아보는 박수근 화백과 안목적 인연만큼의 계기만큼 그처럼 될 지도 모를듯 빗대어 지칭한 것은 극찬 임에는 분명하다.

참고로 수월 문하생으로서 동문인 조각가 김번 선생이 서양화가 박수근 선생께 그림을 어렸을 적 배웠다는 말도 떠돌고 있는데 사실이면 제자로 볼수도 있으니 계보로는 멀더라도 더더욱 놀랠만도 하다.

여러 모로 김번 선생과 성파 장용호는 인복을 타고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선전에서 소조로 입선을 하셨던 전래가 있는 사진작가 문선호 선생은 권옥연 화백의 흉상을 주선 해 주셨다.

권옥연 화백의 흑백사진을 사진작가 문선호 선생이 직접 찍어서 미리 만들어 보았고, 직접 내려와서 작업 모델로 내려왔고, 성파의 솜씨가 괸찮은지 기대 이상의 호평을 해주셨다.


초현실주의 주창자앙드레 브르통으로부터 평을 받은 거장들 중에 한사람인 권옥연 화백은 성파 장용호에게

"서울에서 교수들도 조각해서 먹고 살기가 쉽지 않은데, 지방에서 이 정도 실력으로 이렇게 조각만으로 먹고 산다는 것 만으로도 대단하다"(16년도 첫 공개 언론에는 미공개)

하시면서 신진작가에 대한 부응에 힘을 실어주신 평을 받았다.


 이북이 고향답게 차후 서울에서 제일 냉면을 잘한다는 집에 한시간 줄서서 기다려서, 식사초대를 받았으니 기쁜 기억으로 화백을 떠올려 뵜다.

돌아가시기 수년전에 또 한번 찾아가서 성파로서는 가족처럼 가까운 수제자 지수와 함께 방문해서 감사한 인연을 기리게 됬다.


권옥연 화백의 테라코타 흉상은 부산에서 빌려간 사람이 망실했고, 브론즈는 아직도 유가족이 소장 중이시길 빌어본다.



당시 일본보다 못 미치는 호응으로 한국 사실주의에 대한 회의적인 세간의 반응들을 통해 암담한 심경으로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으로 보이는 조각가(조각스승들 처럼 소조가로서의 그의 예술세계가 더 가깝다.)권진규 선생을 9촌 삼촌뻘이라 진규아저씨라 부르던 권옥연 화백이 기념하며 한국 사실주의 조각세계를 각성시키는데 일조한 분이다.

이러한 권옥연 화백이 브루델의 제자(수월선생이 성파에게 말해준 것으로, 전쟁전 배웠다는 일본에 근거자료가 나왔으나, 영국왕립미술원과 연계적인 조사가 더 필요)로서 줄곳 사실만을 고집한 사이토 소원의 제자로서 소조가 수월 김만술의 제자(20년간 사사)로 조각스승들처럼 이어지는 소조 인체사실을 주로 고집한 성파 장용호가 그의 계보를 권옥연 화백께 피력만 했어도, 그는 지금 쯤 얼마나 그의 예술세계를 지지나 혹은 후원 하고자 했을지 차마 상상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어떤 자신감인진 모르지만, 왜 그때 권옥연 화백께 말을 하지 않았냐고 뭍는 질문에"작가는 작품만 좋으면 알아보게 되여있다"는 말을 아들에게 하며 자신의 사사계보를 알아보려고 도 하지 않았다.


13년도에서야 내가 브루델 제자에게서 배웠다는 증언을 최초로 하고 아들이 믿지 않던 중 근거자료가 나왔어도, 16년도 전에도 자신의 계보를 알려보라는 일언반구도 없으면서, "명예가 학력이 무슨 소용이 있냐? 작품이 좋아야지 작가는 작품만 잘하면 되지"라고 되풀이 말하던 세상물정을 모른듯한 잠룡 호. 그가 조각가 성파 장용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