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언론과 명예의 그는?/책으로보는 평가.

"서울의 YMCA 미술과"수월의 서울미술학교와, 김복진수료 연관성 탐론을 위한 자료

https://rinks.aks.ac.kr/Portal/ContentsView?sCode=ENCYKOREA&sId=E0051529
1925년의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수상한 자각상(自刻像)인 <3년 전>과 다른 입선작 <나체 습작>이 사회적으로 처음 공개 접촉된 한인 조각가의 신미술 조각 작품이었다. 이듬해부터는 서울에서 그의 지도를 받은 양희문(梁熙文)과 장기남(張基男) 등의 습작들도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기 시작하면서 민족 사회에 근대적인 조각계가 형성되어 갔다.

김복진 등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일제의 식민지 상황이던 한반도에 진출하여 정착해 있던 소수의 일본인 조각가들의 조선미술전람회 참가 등의 활동이 선행되었고 조각 학도들도 있었다.

김복진은 미술학교를 졸업한 직후 서울의 YMCA에 신설되었던 미술과에 나가 신미술 조각에 관심을 보인 학도들을 지도하였다. 국내에 전문 과정이나 대학 과정의 미술 학교가 없었던 당시 실정에서 새로운 조각 예술을 뜻하려면 양화 분야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미술 학교에 유학하거나 김복진 같은 선구자에게 개인적으로 사사 또는 독학하는 길을 택해야 하였다.

그렇게 태동되던 조각계의 형성은 그 구심점이던 김복진이 민족적인 의식으로 조선공산당에 가담하였다가 1928년에 일본 경찰에 붙잡혀 1933년 말까지 약 5년간 감옥에 갇히게 됨에 따라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1931년과 1932년에는 평양 태생의 김두일(金斗一)과 문석오(文錫五)가 김복진의 후배로 동경미술학교 조각과를 졸업하고 돌아와 조선미술전람회 출품을 비롯한 제작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서울과 평양 중심의 조각계 형성은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 수 있었다.

감옥에서 풀려난 김복진은 1935년부터 서울에서 이념적 경향색은 없이 순수하게 정력적인 조각가 활동을 재개하는 한편, 뒤에 가서 일본의 여러 미술 학교로 유학을 떠나게 되는 윤효중(尹孝重)·이국전(李國銓)·이성화(李聖華) 등을 제자로 삼아 키우기도 하며 조각계 발전에 거듭 기여하다가 1940년에 40세로 죽었다.새로운 시대적 양상으로 서양의 사실주의 기법을 본받은 순수한 감상의 대상으로서의 조각 예술 형식을 한국에 정착시킨 선구자는 1925년에 일본의 동경미술학교 조각과를 졸업하고 돌아와 국내 최초의 양풍 조각가로 활약한 김복진(金復鎭)이었다. 그는 당시 유일한 조각 작품 발표장이던 조선미술전람회 조각부에 여인상·나부상 등을 출품하면서 각광을 받는 한편, 후배 양성과 사회의 인식 계도에도 많이 공헌하였다.

1925년의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수상한 자각상(自刻像)인 <3년 전>과 다른 입선작 <나체 습작>이 사회적으로 처음 공개 접촉된 한인 조각가의 신미술 조각 작품이었다. 이듬해부터는 서울에서 그의 지도를 받은 양희문(梁熙文)과 장기남(張基男) 등의 습작들도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기 시작하면서 민족 사회에 근대적인 조각계가 형성되어 갔다.

김복진 등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일제의 식민지 상황이던 한반도에 진출하여 정착해 있던 소수의 일본인 조각가들의 조선미술전람회 참가 등의 활동이 선행되었고 조각 학도들도 있었다.

김복진은 미술학교를 졸업한 직후 서울의 YMCA에 신설되었던 미술과에 나가 신미술 조각에 관심을 보인 학도들을 지도하였다. 국내에 전문 과정이나 대학 과정의 미술 학교가 없었던 당시 실정에서 새로운 조각 예술을 뜻하려면 양화 분야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미술 학교에 유학하거나 김복진 같은 선구자에게 개인적으로 사사 또는 독학하는 길을 택해야 하였다.

그렇게 태동되던 조각계의 형성은 그 구심점이던 김복진이 민족적인 의식으로 조선공산당에 가담하였다가 1928년에 일본 경찰에 붙잡혀 1933년 말까지 약 5년간 감옥에 갇히게 됨에 따라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1931년과 1932년에는 평양 태생의 김두일(金斗一)과 문석오(文錫五)가 김복진의 후배로 동경미술학교 조각과를 졸업하고 돌아와 조선미술전람회 출품을 비롯한 제작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서울과 평양 중심의 조각계 형성은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 수 있었다.

감옥에서 풀려난 김복진은 1935년부터 서울에서 이념적 경향색은 없이 순수하게 정력적인 조각가 활동을 재개하는 한편, 뒤에 가서 일본의 여러 미술 학교로 유학을 떠나게 되는 윤효중(尹孝重)·이국전(李國銓)·이성화(李聖華) 등을 제자로 삼아 키우기도 하며 조각계 발전에 거듭 기여하다가 1940년에 40세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