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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과 명예의 그는?/책으로보는 평가.

김만술이 비유학파라는 오류를 범한 논문"김종영과 서울대학교" [김정락]

해방된 한국의 조각계는 열악한 환경과 인적자원으로 인해 참담한 지경 이었다. 이경성이 이것에 대해 올바르게 지적하고 있다. 10 당시 대부분의 조각 가들은 일본에서 유학한 사람들이었다. 특히 동경미술학교 출신들이 주류를 이 루었는데, 1925년에 졸업을 한 김복진을 필두로 하여 윤효중과 박승구 등이 있 었고, 김종영도 이 부류에 속했다. 

11(도판2) 초기 미술대학교육을 형성했던 시 기에 김종영은 장발과 더불어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장발은 일본의 전문학교적 미술교육보다는 미국의 미술대학에 준하는 학제와 교과과정을 도입하였다. 김종영은 스스로 일본 유학을 통해 체험했던 일본의 관학적인 교육방식을 지양하고 장발과 함께 보다 현대적인 대학미술교 육을 준비하고 수행했었다. 9 장발은 서양화가이며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의 초대 학장을 역임했으며, 이승만 정권 말기 국무총리를 지냈던 장면의 동생으로 이탈리아의 대사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1901년 인천에서 났으며, 보성고보를 졸업하고 20년 일본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하였으나 22년에 중퇴하고 도미하여 컬럼비아대학에서 미학과 미술사를 전공하여 25년 수료했다. 1934년에 이종우, 구본웅, 김용준, 길진섭, 이마동 등과 함께 예술단체인 목일회를 결성하였으나, 이는 정치적이며 사회적인 문제에 봉착하여 38년에 제2회 회원전을 개최하고 해체되었다. 장발은 1945년 해방 이후 서울시 학무과장을 역임하고 교육행정의 실세가 되었다. 또한 당시 고희동, 김용준 등과 덕수궁에 모여 미술학교 설립 발기대회를 가졌고 미 군정하에 국대안을 추진하는 장본인이 되었으며, 초대학장이 되었다. 그는 1961년까지 미대학장을 역임하였다. 장발의 활동과 이력에 관해서는 정영목의 「장발평전, 1946–53」, 조형연구소학술대회, 2010, 「조각교육의 교과과정을 중심으로」, 『한국 현대미술교육과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1946–1960』, 서울대학교 개교50주년 기념학술심포지엄, 1996 참조. 

10 이경성, 『한국근현대미술연구』, 동화출판공사, 1980, p.117. 

 11 비유학파의 경우는 김만술이 거의 유일한 인물이다.

{결코 있을 수도 없는 무근거 자료이다.

수월은 구조사조소연구소에서 사이토소원을 필두로 한 사사로서, 제자 동문들과 실습 실전적인 조각가의 길을 간 것으로 생각된다.

성파도 구조사에 수월이 유학의 개념으로 인지하여 증언해줬다.

자신이 사사라고 성파에게 말했는지 기억이 불분명하나 고모리 쿠니오는 자신을 사사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