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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용호의 중심 공간!/다양한그의 인연

브루델 제자의 제자가 수월 김만술 왜 이제서야 밝혀진 것인가?(김남수의 박수근을 빗덴 평가外)

"학연이 없이 대성한 조각가이고 보니 그의 작품세계는 독창적이고 개성이 뚜렷한 자기언어를 가지고 있다 . 서양화가 박수근도 스승이 없이 독학으로 수학하여 한국 정상의 제 1 인자가 됐다 . 그에게는 미술대학도 외국유학도 미술관련 전문서적도 전혀 접할 기회가 없었다 . 그는 한 눈을 팔지 못하고 오직 올곧은 한 길만을 걸어가야 하는 것이 운명적인 것이었다 . 그래서 그는 남의 것 훔쳐보는 기회도 없었고 모방이나 흉내를 몰라 유화인 순종 한국성으로 세계시장의 공감을 얻은 것이다 . 그의 작품이 소더비나 크리스티 등 세계경매시장에 상장되는 것도 그들에게 세금과 경매수수료를 떼어주는 것도 국제시장의 공신력을 통하여 공인 받고 있기 때문이다 .

장용호도 비록 조각 장르의 발상지가 서구이기는 하지만 그가 화랑도상 , 김유신상 등 한국성을 추구하면서 창조적인 조각상에 심혈을 쏟고 있으며 , 금후 만일 그의 작품이 국제적인 공감대를 얻어 낼 때 세계수준의 반열에 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


-아트코리아 06년 1월호 중에서-


화랑도상은 성파가 많이 손덴 부조고, 2차 고증 청동제작 시기에 수월 선생과 같이 했다.

 참고로 김남수씨가 국전 입선 두번의 성파를 권옥연 화백의 뜰작가를 알아보는 박수근 화백과 안목적 인연만큼의 계기만큼 그처럼 될 지도 모를듯 빗대어 지칭한 것은 극찬 임에는 분명하다.

참고로 수월 문하생으로서 동문인 조각가 김번 선생이 서양화가 박수근 선생께 그림을 어렸을 적 배웠다는 말도 떠돌고 있는데 사실이면 제자로 볼수도 있으니 계보로는 멀더라도 더더욱 놀랠만도 하다.

여러 모로 김번 선생과 성파 장용호는 인복을 타고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성파는 학연을 뚜렷하게 내세운 적이 흔히 없었다고 보는것이 더 정확하다. 

수월선생("처음부터 큰상 받으면 거만해 진다. 입선부터 차근 차근 올라오는 것이 좋다" 하시고서는 말엽에서야 "니는 와 나한테 공모한것을 말하지도 않았노" 하셨다. 대상수상때는 수월선생과 아에 연관이 없었다고 한다.)께 신라미술대전에 자신이 먼저 작품을 낸다고 고백한 적도 거의 없었던 철저한 자기주의적 작가로서 수월선생의 큰 작업을 하면서도 자신의 작품활동을 작업실 안에서 10년간 해왔었고, 자신의 사사내력(수월 선생이 여태껏 대중에게서 그렇게 주목을 받지 않았음에도)을 대중에 공개하기 꺼려한 작가였고, 그 금단의 벽이 깨진 것이 아들 때문에 16년도 부터 이다.


아들이 좌대가 더럽다고 핀잔을 주어도"작품만 좋으면 됬지"였지만, 한국 미술계는 그렇게 녹녹하지가 않다는 것이 살면서 느껴왔던 것이다.

아들이 한국 근현대 미술사 최초로서 부친을 높이 듯 미술학도들이 이 특종을 스스로 밝히지 않게 한 것은 참 유감이지만

수월선생이 성파에게 언급한 '브루델 제자'로서의 이것이 거의 비밀로 부쳐진 것은 한국 첫 근대조각가 김복진의 직속제자 였음에도, 조각가 김경승의 작업을 같이 하였음에도, 수월 김만술 선생이 중앙 미술계를 멀리한 것도 있지만, 자기 제자만 내려오게 하는 특이한 이력인 일본서부터 사이토 소원(일본 최초의 조소전문단체 구조사 창립자, 영국왕립미술원으로서만 설명을 그쳐,)의 내 제자들 위주로서 만을 구술 전승시킨 듯한 계보가 주효한 것이 그 이유였다.


수월 선생에서 얼마나 미련스럽게 철저한 작가가 성파였는가?

사사시기때도 수월의 흉상을, 돌아가실때 임종때도 수월의 흉상(청송展도록에 은사로 첫 지칭)을 만들었다.

성파가 자세히는 기억(김용섭(불교조각. 아들도 김복진계 대를 이음)선생은 가르침의 한 대목을 기억함)을 못하나 수월 선생의 가르침 중에 "작품이 좋아야 되는 것이지. 작품이 잘 나와야 중요한 것이지. 학력과 수상을 내력을 내세우는 것은 옳은게 아니며 일종의 사기성이 있다"고 보았다고 한다. 성파도 그 내용을 들은 바가 있는 바람에 국전 욕심도 덜하고 그런지 모르지만, 사실 자신이 남 앞에서 누구 제자라고 지칭한 것을 아들로서도 거의 들어본 바가 없었다.

(아들이 그래도 세상에서 가볍게 보는 경향이 있으니 중요한 사람 있으면 말하라고 권하니, "내 자랑도 아니고, 내가 내 계보를 어떻게 말하냐. 이번에 실린거 보면 다 나오는데 이거 보시라고 하면 되지" 돈 아껴야 된다고 발권도 적게 받았으면서, 막 퍼주는데, 당황스럽다. 차라리 말문이라도 열리던가. 복사해서 인쇄 맡겨서 적절하게 나누어 주라고 권유(특히 권진규 선생을 연구나 아는 분들)했다.)

이전 언론에도 수월선생 문하에, 독학 했다, 재야 조각가다 이런식으로 에써 성파가 데략 정보를 주고 언론이 비평가가 마음데로 실도록 놔둔 것이다.

이동호씨의 칼럼에서 '(자신을) 제자로서.. 김번선생의 '제자로 있었다는 설명 글, 성파는 (가장 근접한게 '수월 선생 문하에서'...)여태껏 스스로 제자라고 지칭 조차도 안한 잠룡호다.


이런 사실을 브루델 제자에게서 배웟다는 그분이 누군지도 몰랐던 성파는 더더군다나 조금이던 많게든 배운 제자들에게 자신이 브루델제자의 제자의 제자다라고 일언반구도 없던 성파가, 이 계보에 엃힌 소동을 두고 나중에서야 "그것이 우리 학파의 특징이라는 의미를 가진다."고 운을 뗀 것인데 과연 그러한 것이엇다.

일본에서도 웹에서 '브루델에게서 배운' 나오는 자료가 고작 한건이라는 것이 황당할 정도로 계보의 내력이 고사는 면한 것 이리라.


 테라코타 소상을 1점하고, 그림을 위주로 조각작업을 불상 마감과 화관 장식을 조금 돕고, 잡무들을 거들어온 아들로서 4년동안 사사한 아들에게 "수월선생의 조각 스승은 누구냐?"고 답을 빌어 운을 띈것이 13년도이다.

브루델 제자들이 얼마나 작품값도 비싸고 유명세를 타고 있는데 지방에서 이러고 있나 아들이 집안형편을 꿰고 있으니 별별 생각을 다하며 거짓말이라 생각해서 믿지 않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즉 부친의 불규칙한 수입으로 절약을 몸소 경험하고 형편이 어렵다고 부친의 용돈도 받지않고 식비만 해결하고 돈은 삼촌일을 조달하며, 재야 조각가라는 평과 함께 지방의 주목받지 못한 것으로 생각하며 아쉽다고 도와드린 일들이 헛된것은 아니라는게 충격적일 수 밖엔 없었기 때문이다.


조각가 권진규 선생이 추상을 배격하여 가지게 된, 한국 조소 사실의 입지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브루델로 이어지는 한국 소조 사실주의 명맥(한국 브루델학파계보 소조 인체사실주의)이 또 다른 브루델의 제자로서 이어져서 유존되고 있다는 것 만으로도 미술을 조금이라도 아는 기자들이라면 대서특필 감이기 때문이었다.(몰라도 취제요청이 들어올 판국 이었다니...)


수년간 성파에게 언론사 요청은 거의 없었는데, 이상하게도 처음 근거자료가 나온 몇개월후 주간인물에 인터뷰 요청이 와서 계보내용의 간단한 이력으로 언론사 송고를 하게 된 것이다. 이때 성파가 처음으로 기자글을 아들의 글을 감수했다.(내용의 최종본이 시사뉴스타임 5월호로서 권진규 선생이 9촌 삼종숙부를 삼촌이라고 약칭한 미술칼럼으로 인해 삼촌이라 기제된 실수,  "영국왕립미술원과 브루델, 서울미술학교 김복진 미술사적 연구 과제"는 가독성을 위해 내용에서 뺏지만...)

성파가 서울경제TV, 이코노믹뷰어(아시아 뉴스통신: 월 예술가 특집에 이왈종 화백이 실림. 특집에 실어드리겠다 함), 스포츠 조선, 시사투데이(전에도 한번), 월간 인물(월간 인물은 요구사항이 별로없어 괸찮았지만, 아직 오래되진 않았고, 나중에 할 듯), 조선일보 송고를 중심으로 하는 언론사등 연락이 이토록 난리가 난거는 김지미씨 때 다음(일일이 자료를 체크 못했지만 인터넷에 안잡히는데 하여간 많았다고...)으로 일생일대에 처음이었다.


근현대미술사에서 성파가 마땅히 차지해야 할 입지가 어디까지 였을지는 후대에 일단 전해주고 싶다는게, 성파의 조각세계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마무리에 대한 과정으로 내력을 견주어 보고 있을 뿐, 나에게 어떤 상속적인 욕심이 분에 넘치고자 영달을 누리고 싶어서가 아니다. 이 예술적 자산가치가 좋든 나쁘든 업을 만드는 증폭성적인 연장선에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분명 은혜를 갚아야 될 자리에서 그만한 가치임을 밝히면서 희사하거나 그런 뜻으로 이루어 지게 하는 것이 자식으로서의 도리가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