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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용호의 중심 공간!/아들의 작품들도

부르델의 제자의 제자의 제자 성파 장용호를 4년 사사(보조 조수로서)한 아들 장무진 관련 첫 논단(갈무리 차원)

공업고등학교 시절에는 풍물에 관심이 있어 새벌 풍물패 동아리 활동을 하였다. 후반기에 통상 취업업체 경험으로 매겨지나, 미대 진학 때문에 후반기 6개월간 (서양화가 손수택의 아들되시는 손범천 원장 영남대학교 조소과 전공) 학원에 다녔다.

경주동국대학교에서 불휘 풍물패에 들었다. 휴학 끝에 중퇴로 1년간 수료가 되고, 부친이신 성파 장용호의 부친으로서의 사사(보조, 조수)이다.


8년(8392)동안 부친에게 무급으로 있었고, 용돈은 잘 요구하지 않았다. 생활비는 간혹 예술에 대한 고민(불규칙한 생활고, 부친의 미숙한 제자에 대한 견해 및 보상, 어머니가 병세로 인한 실언에 숙모가 받은 심적인 상처에 미안함에서 도와드림)에서 삼촌 파장사를 도우면서 알아서 조달하고 부친에게는 식비만 내가 인터넷으로 결제하여 저렴하게 자체적으로 조달 받았을 뿐이다. 운전면허로 1개월間(100), 11개월(1100)동안 신라직업전문학교에서 용접(co2, 알곤, 전기, 절단)실습이 있었고, 군복무(사단 공병대대)24개월(2400), 성파의 조각공원이 이루어 져서 창업을 후원하겠다고 단언하여 조수로서 경제적인 고민이 있다가 성파의 자신의 작업을 더 도와주시면 안돼겠냐는 의중 끝에 집도하여 수제자가 된 한지수의 커피숍 따님(누나)의 추천삼아 장래적인 고민끝에 경주직업전문학교에서 요리실습을 8개월間(816) 익혔다.


그레서 총합 부친께 4년間(2007.11.27~2016.05.19=상주(常住 摠 4年間4076) 사사 받은 것이 된다.

 이 기간中 대외적인 활동으로는 (신라공예협회展 준회원 몇회) 유일하게 예맥회展만 수년간 속해있다.




현재 예술계통으로는 나만의 끼가 내 욕심으로 업보나 욕망으로 가문과 나 자신의 본연을 훼손하는게 아닌가? 란 견제로 잠시 자제하거나 보류 중이다.


무용으로는, 풍물에서 기인한 고대 한국의 불교고전무용과 음악류를 복원 혹은 창조하고 싶은데서 기인한다. 아시아 이슬람류 불교류 고전무용, 벨리댄스 독학적 창안으로 계기가 주어지면 독학의 무용세계를 널리 알리고 싶은 욕망(월드뮤직에 기인한 댄스, 최승희류 무용에도 관심이 있지만, 사사 제자께 배우기에는 생업 때문에 어렵고, 그저 시간이 남는데로 독학)도 있지만 자제하고 있다. 설장구는 자신있다. (가락체보를 판박이 하는 것보다 창조적인 가락을 염두하는 스타일) 벨리댄스 타악기에도 향후 계획을 두고 싶다만 아직 악기를 사지않아 미지수.


회화로는, 서양의 앤디워홀적 창안에서 나오는 오방형광(서양의 오방이라고 생각한다.)을 모티브로한 추상화, 동양에서 한국의 오방색을 결합한 10방화(일(한)선화: 한선을 끈기지 않고 싸인(마침점)까지도 그림의 일종)로서, 동서의 오방색 결합으로 나타난 동양추상을 화두로 작업한 그림인데, 대표작으로는 환생하는 공부(원형 훼손: 복사 사진만 전시)다. 아세아닭이 2007년도에 그려진 뒤 성파의 추천으로 환경미술협회에서 특선을 받았다.

특히 환생하는 공부는 한미키의 그림유형과 닮은 듯한데, 이 화풍과 비슷한 대가의 그림은 미로가 있다. 한미키 화백은 15년도에서야 웹에서만 정보로 접했고, 나의 작은 그림과 비슷한 류형으로 결국 한국의 큐비즘으로 달성하신 대가가 한국작가라는 사실만으로도 놀라면서 속으로는 사사받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참고 있다.


미술사조는 추상(선과 색면類) 주창한 사조는 1선10방화(일선화에 기인한 오방형광화 및 오방색과의 색선 색면 혼재로 동양의 여백(바탕면)을 추구)로서 창안했고, 수법은 자동 線드로잉에 인한 우연색면비례으로서 처음 밝힌다.



조소로는, 성파에게서는 어렸을때 만든 불상과 토우 작품을 구워주신후, 보조조수로서 초창기 '참선'이란 남자 누드 모작과, 흉상으론 김재성 사모님 작업때 잠시흙을 붙였고, 지월스님의 마감(성파는 이를 시아기라 한다.)작업, 진언불교 밀교조사상의 장신구 준제보살의 지물, 관음보살의 장신구 화관, 마감 작업등을 했다. 성파의 누드작품이나 작품에는 일체 내손이 가는 것 조차 통상 거부했다.(향후 추상계열 인체 작품을 도울 날이 있는지는 미지수)

나는 인체사실주의에 있어서 누드쪽은 외설적인 측면에서 미술사조에 있어서 독특하게도 예술적인 측면보다 광기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부친의 아들로서 어릴적부터 누드동영상도 아무렇지 않게 틀어준 것에 있어 무감각해져서 그런지 성파가 만든 소조 누드는 야하다는 생각이 아닌 그저 작품으로 견지하는 바 이지만, 감정에 있어서는 여성의 누드에 대해 야하다 부끄럽다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논평으로는, 이제까지 익명으로 써온글들이 통털어 블로그에서는 2십만명이 넘는 조회수를 기록중이다. 그뜻을 세간에 알리고자 노력했으나, 내가 알리고자 요주를 주창하신 분(종교인은 아니다.)의 말씀을 세기고 나한테 경제적으로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소신을 가져, 선의로 알리고자 주목받기 위해 의도적으로 격하게 마음데로 쓴 글들을 결국 과오를 인정하고 글을 자제하고 있다.


이 와중에 한국근현대미술사에 속하는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수월 선생과 성파의 이야기들이 세상에서 받아 들여지는 비중이 부족했음을 통감하고 조금 남아있는 자료들 일 지언정 재조명 하는데 일조하고자 한다. 그리고 부친으로서 성파가 언론사 송고본에 대해서 마음데로 기자나 평론가가 실려주던 글에 대해 처음으로 직접 감수하는 계기를 청했다.


내가 글쓰는 것을 기피하고 있지만, 여기에 대해 논평을 해드리는 이유는 이미 그전에 밝혔다.

(현재 자본이 모이면 창업이나 부친의 예술세계를 후원하거나, 마무리짓는 차원에서 정리나 적절치 못한 일들을 아들로서 타계하시기 전에 살아생전 평가 및, 사회환원 등까지도 감안하며 갈무리 짓고자 하는 계획이다.)


내가 각 미술대전에 그림을 위시해 조소는 주로 인체사실(기인한 추상으로 생각 구조적인 종이접기와 조소의 결합, 친환경 조소기법이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로서)위주로서 독창적인 작품세계가 나올때가 만약 온다면, 브루델의 조소 인체사실 계보가 한국에서 끈어지지 않고 전승되는 것 이라고 생각된다.



내가 꼭 하든 안하든 나의 알량한 재주로 조각스승들의 계보를 이어 세상을 예술로 어지럽히지 말고도, 1년간 인체사실을 생각하는 조각가 남자 사사생이 나오기를 소망한다.


(1대 로댕 창종 2대 브루델 사사 3대 사이토 소원 (조소 인체사실주의, 다다양식) 제자 4대 수월 김만술 (조소 인체사실주의, 대작 조형물, 불교조각) 사사 5대 성파 장용호(조소 인체사실주의, 소품 테라코타, 종교조각, 초기 추상) 사사 6대 ?? ???

사사: 죽기전에 소조 인체사실주의를 일부라도 이어갈 현재 전업작가, 작가 남자 사사제자를 양성할 의향이 성파는 있다. 

국내에서 소조작업을 필두로 하는 계보는 아직 유존되는 것이고, 여자로서는 대중적인 활동은 자제하나, 경주 내남 "수통골 찻집"의 조각가 박경희씨가 테라코타 조소작업을 작품만을 중점으로 (김번선생을 사사(목공예가 밥홍)한 소조 전업작가가 없다면) 국내에서 유일하다고 볼수 있다.


이 때문에 권진규선생을 2년간 사사한 현재 돌조각 위주로 활동하는 김동우 선생이 타계하기 전에 누군가 조소적인 사사활동을 제기하여야 국가적으로 큰 의의가 있는 것이다.


남자로서는 사실상 성파의 정식 사사에 의한 소조 전업작가는 현재 없다. 아들이 작가로서 계보를 부분 계승으로 이어갈 순 있으나 전업작가가 되지 않는다면, 상주(상시출근, 숙식)하며 대를 이어가던 로댕으로부터 이어지는 소조로서의 국내 조각가 사사 계승은 이제 끝날수도 있다는 것이다. 단지 조각가 조무현씨가 성파의 작업동참 권유에 보조 조수로 사사한 전업 조각이지만 성파의 문하생으로 공포한 적도 없고, 사사하고자 참여한 것은 아니다.


이 때문에 이글을 읽고 몇년간의 사사를 깊이 이어나갈 성파의 문하생이 미술사적으로 깊이 현직 전업작가들 까지도 포괄해서 심사 숙고하여 고려될 사항이다.


나의 진솔한 글에서 겁부터 먹을 사람들이 숱하다.


내 인생은 아직 젊지만 오판한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버지를 거슬렸을때 내가 잘되있던 적이 많았었다. 한가지 예를 첫술로 들자면 내가 모자란 탓도 있지만, 아버지가 조소와 흡사하다는 말로 꼬드겨서 용접자격증을 따려고 했지만, 결국 1년을 소모시켰다. 고등학교에서 트집을 잡아 5명 정도의 동기에게 언어적인 폭력과 강요등으로 구타등의 학교폭력을 당한 나로서는 이런 시간적인 보상이 병역특례로 돈을 벌면서 유예기간을 가지는 것이 대인과의 기피성을 심화시키는 후유증만큼 각오할수 밖에 없는 목마른 가뭄의 물같은 존재였다.


 병역기간에 불상사가 벌어질게 뻔하여 일부러 군대를 늦게가게 된 이유가 일조된 것이다. (늦게 간만 큼 간부들이 도와준 것도 있지만, 알동기가 같은 보직으로 일 못한다고 욕을 많이했다. 공병인데 기계 조종을 잘 못하니 본의 아니게 피해를 줫다.) 그러니 필기에서 낙방하여 회사에서 취직할 자신이 없이, 군대에 갔다. 간혹 여전히 부친은 대학에 마져 다녀라는 권유를 두고 

'어차피 1학년 부터 새로 밞아야 하고, 요즘 미대 나와서 취직이 어찌되냐? 보장이 있나? 차라리 아버지한테 있는 것보다 1년 동안 실질적인 조소는 안 가르쳐 주더라. 내가 어떻게 1년 댕겨도 교수님께 취직한다는 분명한 보장도 없고, 별로 갈켜준 것도 아버지보다 없고 아버지가 어려운데 5000만원 돈 들일바에야 아버지가 내 집이나 지어줘서 창업 하는데 나좀 지원금이나 들이라고 장사나 좀 하게 여물게도 사니까'

'내가 아버지 내력이 어찌됬 건 사사를 받은 것이, 아버지가 가진 브루델 제자 계보의 진실이 바뀌는 것도 아닌데 아버지는 어차피 사후에도 평가가 나올수도 있는 사람이 내가 보기로는 확실한데 욕심이 너무 많아. 나한테 작품욕을 일으키는게 중요하지 그런것을 빼먹은 들 대학이 소용있냐'


등 등 그래도 젊은 혈기에 일단 내돈이 있어야 가능한 택일 정도다. 이미 있는 부동산도 막상 처분할려니 곤란한 과중에 조금만 더벌면 땅만 있으면 아주 조그만한 집이 생길 일을 오히려 작품욕 때문에 주변에서 짓지도 말라는 비닐하우스를 지어놓았다.


 세간에서 주목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한 나는 경제적으로 불규칙하여 형편이 어려운 부친을 도왔다.

이렇게 뭣도 아닌 아버지로서 그의 아들이다 라는 그것으로 내 운명은 종 쳤을수도 있는 것이지만, 사주에 내 운명은 상속도 많이 받고 돈을 잘 모으는 형국(부친이 제일 많이 말한 것이 "절약"이다.)이란다. 하지만 평생동안 남밑에 있는 식의 말도 들어서, 남밑에 있는 사주라나? 그럴바에야 내 부친 아래에 그리고 내가 글을 써서 내가 진심으로 존중할 대인을 알아 그 알리고자 했던 분 아래에 있겠다고 생각했다.


왜 헛되지 않았고 왜 상속을 많이 받는 운명인가? 저 조소 작품들이 많아도 아버지는 불규칙한 형편 속에서 주목받지 못해서 고통받을 것을 대비한 듯 절약을 외치면서, 열심히 살아서 잘사는 사람도 많은데 왜 수월 선생을 택해서 사사시 기 중, 한달 30만원을 받아 가면서도 이길을 택했는가? 그런데도 교수급이나 시간강사 제의 조차도 거절하고, 

여제자들을 난처하게 끔 어려운 처우를 주듯, 와이프에 대한 오해로 해명조차도 제대로 안한 경우도 있는 지라 얼룩지게 했는지... 조각스승들 처럼 큰 오해는 피한 운명 이였지만 말이다.


죽엇다 께어나도 아들로서는 이해가 안 되었기에 설득을 하고 어떻게 앞일을 내가 짜 드릴건지도 첨언을 해 드렸다.

인생의 경로가 좋고 나쁜점이 모두 맞 물려지는 묘한 데가 있는데, 다 그만한 뎃가가 있는 듯 하다.

"나는 재물이나 상속에 욕심이 없다. 죽기전에 도를 마무리 지어놓고 가시라 자식한테 논란을 남기지 마시라. 내 결혼운이라도 트이게 빌듯이 내가 원하는 것만 하시라 그 이상은 원하지도 않는다."고 늘 예기한다.

내가 너무 절약에 뇌쇠돼서 그런가? 돈이 엄청 적어도 버텨지는데 일각연이 생겨서 재물에 욕심이 없어도 내 스스로 입에 풀칠하는데는 어려움이 없을 정도이니 말이다. 벌써부터 이 나이에 그러면 쓰겠는가?


군대 휴가중에 브루델 제자에게서 배웟다는 수월선생이 성파한테 2~3년 지나서야 말씀을 해주시더 란다.

나는 거짓말로 치부하다, 16년도에서야 언론사에 송고나 취제에 응하라고 하였다.


그야말로 내가 부친이 안스럽다고 거들어 드린것이 헛되지는 않았구나 하고 늦즈마이 한숨을 내쉬었던 백수같은 나날들의 역전의 순간이 15년도 말엽이었다.


이것은 한국근현대미술사에서 대서특필이 아닐 수 없는 것 이였다.

사사제자 제자 포함 10명의 사사생중에서도 비밀에 부쳤던, 특히 수월선생이 성파한테 들인 것이 무엇 이었는가? 지금 내게 회심의 미소를 안겨주시는 그것인가?


브루델의 제자의 제자가 권진규 선생이고, 그 삼종조카인 권옥연 화백이 문선호 선생이 찍은 사진을 종합하여 흉상의 예술성을 치하하며, 권진규 선생外 조각가로서 권옥연 화백께 (유일할지도?) 평을 받은 분이 나의 부친 성파 장용호다.


현재 권진규 선생의 실물대보다 조금 적은 흉상이 3억3천임은 조소 사실주의의 작품성 부재라는 일부 외면 속에서도 한국근현대미술사에서 제일 중요한 위치의 조각가(소조 위주)중 한 사람이라는 것은 누구나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나, 그 고난이 자살에도 한이 씌인 듯, 성파도 경북권에서의 명성과 달리 급전에서는 가시밭 길인 것이 뻔하 듯, 달리 짐작이 안설 것이다.


 백수라는 오해처럼 태만히 살아온 듯 하지만, 그 말이 100%까진 아닌 것은 얼마든지 증언 해줄 수 있다. 그만큼 절약 하나만을 걸고 시간을 허비한 적도 많았다. 하지만 삼촌의 불규칙한 일용직에 치중한 과정이 길기 때문에 상속받을 유산은 갑부인것은 분명하지만 스스로는 자비가 없는 고초 때문에 혼사도 부친을 핑개삼아 연애를 해야할 판이 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남자 사사 제자가 나타난다면 나 또한 입지가 좋아지면 후원해 줄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