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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용호의 중심 공간!/다양한그의 인연

조각가 수월 김만술 의, 서툰 제자표현?

김남수 평론가 글 中에서...


이때 까지 그가 완성한 얼굴 ( 인물조각 ) 만 무려 500 여점에 이르며 , 브론즈 , 테라코타 등 우리나라 초대전 규모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면서 가장 방대한 전시회이기도 한 이번 군립 청송 야송미술관에서의 초대전은 작가 장용호의 기량과 재능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쾌거를 보여 주었다 .

스승의 뚜렷한 지도나 가르침 없이

 

(성파 아들 추가: 상충되는 글이지만 사실 성파의 증언을 들으면 수월선생은 자신의 작품은 큰 작업을 제외하곤 흉상이나 자신만을 위한 작은 작품에 손대는 것을 싫어하던 분이셨다. 성파는 또한 상주시기에 자신의 소문을 듣고 맡긴 주문제작을 병행하였다. 그리고 제자를 자신의 일손을 돕는 것 외에는 독립적인 작가로 보았던 것 같다. 수학한 제자가 많든 적든 배워 거쳐 간 것도 있겠으나 성파를 장 군이라고 불렀다. 분명 조금 늦은 문하생인 사사기간이 수제자 급의 성파한테도 제자라는 말은 입에도 안담은 것으로 비춰진다.


하지만 자신이 브루델 제자에게서 배웠다는 사사 내력을 밝힘으로서 자신의 제자로서 분명히 되겠다 싶어. 애둘러 표현 한 것으로 보인다.

성파는 은사라는 호칭으로 도록(청송)에 기제 했고병환때 병실에도 왕래하며 흉상(총 2)을 남겼다.


자신이 제자라고 칼럼에서 언급한 조각가 이동호씨 조차도 자신의 칼럼 기제에 브루델 제자에게서 배웟다는 말이 없을 정도이니, 들은바가 없기 때문이 아니련가 싶다.)

 

재야 작가로 독학을 한 작가 장용호는 앞서 모두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중세 유럽사회에서 인간의 해방과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운동의 일환으로 종교미술의 전성기를 맞았던 시절에 인물 동상이나 흉상 등이 많이 제작되었고 , 이들 모든 작품들은 재능을 가진 장인들의 작품들로 신의 영역이나 권능으로 만들어 졌을 것이라는 찬사와 갈채를 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