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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용호의 중심 공간!/다양한그의 인연

불교조각연구원佛敎彫刻硏究院 소조(조각)가塑彫家 수월水月 김만술金萬述 선생先生

한국근대미술 : 조소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펴낸 책인, 근대를 보는 눈에서는
선전(鮮展)에서
1942년21회「박군의 상」입선
44년23회「와다나베씨의 초상」입선
이 기록을 김만술이 아닌 김광작 이라고 되어 있었다.
그때 수월 선생의 이름을 일제시기에 선전에서 잘못 기제 된건가?
이 책에 수월 선생의 당선작 (이명일지도 모른다.)


운전이 본업인지 소상 만드는 게 본업인지…. 하여튼 두 가지를 같이하니 어깨에 신바람이 났지. 그래서 내 실력을 인정받아 보자 싶어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을 했지. 1942년 21회 선전(鮮展)에 「박군의 상」이 입선되었고, 23회 때는 「와다나베씨의 초상」이 입선되기도 했지. 이 와다나베씨는 청진과 경주를 왔다갔다하는 토목 공사 업자였는데 우리 목공소와 거래를 한 사람으로, 그 분이 나를 보고는
   '이런 예술가가 전쟁에 나가 죽으면 국가적 손실이야.'
하면서 여기저기 손을 써서 나를 징용에 끌려가지 않도록 해준 은인이었지.


김복진씨 기초조소실습이라는 경력으로 적으셨다.

훗날 창작기조의 발판을 위한 배움이셨던 것이라고도 생각된다. 그러나 사사로 명확히 이해할 수 있을지는 학자들이나, 차후 문하생의 진술에 더 맡겨본다.

이러한 영향으로 불상조각의 우리 종교예술의 백미를 따르는 전통기조의 영향을 추구하던 근대미술적 구현의 영향은 있었을 것이다. 

그 당시 일본에서 3년간 수료하며 습득 할수 밖에 없던 것은 우리나라의 미술개척 시기로서의 국내 근현대 현대 미술사조의 조소적 미술 기반이 현저히 드물어서 해외에 대한 예술습득의 체험과 경험적인 요인이 있었다.  

우리 근대미술의 자립적 개척을 여는 발판으로 그래서 일제 때나 남한수립 초기 시점 등, 해외파나 동경유학파들이 우리나라에서 많은 것이 사실이다.